내 관심사 산야초

황칠나무 자료 수집

dudfks0522@hanmail.net 2009. 3. 31. 06:51

남도 이야기 <58>

 

황칠과 서남해안

 

 

신라 유물에 황칠성분 들어 주 교역품… 최근 이용가능성

 

 

그대 아니 보았더냐 궁복산 가득한 황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 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 물감 어찌 이와 견줄소냐
(중략)
이 나무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서
박물지(博物誌)에 왕왕이 그 이름 올려 있네
공납으로 해마자 공장(工匠)에게 옮기는데
서리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이 이 나무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하략)


 

황칠.jpg

 

▲황칠의 영화(榮華)를 꿈꾸며 재배에 나선 정순태씨.

 

 

 전남 강진에 유배온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1804년 썼던 ‘황칠(黃漆)’이란 시로, 송재소씨가 역주한 ‘다산시선’에 실려 있다. 해마다 공물로 바쳐야 하는 황칠의 량이 서리들 농간 때문에 갈수록 많아졌다. 이리하여 황칠 나무를 도끼로 몰래 베어버리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는 농민들의 아픔을 다산은 고발하고 싶었으리라.

 이처럼 황칠이 200년전 만해도 도료로 쓰여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황칠에 대한 기록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황칠은 중국, 특히 황실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도료였기 때문.

 북송(北宋) 시대 백과사전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당 태종(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에도 이 같은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더 있다. 황칠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역대 주요 교역품이었다.

 최근 관심을 끌만한 연구성과가 나왔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 신라 제사 유적에서 발굴한 도기 그릇에 담긴 유기물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황칠로 밝혀졌다. 더구나 유기물질에서 전남 해남과 완도산 황칠에서만 나오는 베타 셀리넨(β-SELINENE) 성분까지 검출됐다고 한다. 이 결과를 따른다면 신라의 유물에 칠해진 도료 황칠이 서남해안 일대에 자생하던 황칠 나무에서 채취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아시아 최고의 황금색 도료로 인정 받았던 황칠은 200년 사이에 명맥이 끊겼다. 현재 이 같은 황칠 나무가 해남 등지에서 정순태씨 등에 의해 다시 자라고 있다. 황칠의 역사를 다시 잇고 시장가능성도 크게 보기 때문. 중국의 최고급 가구, 전자기파차단 전자제품, 안식향 기능 염색의류와 신약시장에서 각광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연평균 기온 14도 이하 서남해안 야산 박토에서도 잘 자라는 황칠의 부활, 농민을 괴롭히는 작물이 아니라 농민의 삶을 살찌우는 작물로 커나가길 기대해본다.   

 

 

[한국의 토종] (12) 황칠나무

한번 칠하면 萬年가는 신비의 金빛 천연도료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황칠(黃漆). 은은한 황금색에 내열·내수·내구성이 강한 황칠은 고대부터 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문헌에는 황칠을 예찬한 기록이 많다.‘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금빛 광채의 갑옷을 고구려에 공물로 보냈다.”고 적혀 있으며 신라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가 칠 재료 공급을 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진 글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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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 조공으로 마구잡이 벌목

황칠은 두릅나무과 상록 활엽수인 토종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액체를 정제해 만든다.“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주리요.”

다산 정약용의 ‘황칠’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시로 지을 만큼 칭송한 황칠은 순금을 입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황금빛이다. 그 빼어남 탓에,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조공 요구와 조정 공납을 감당하느라 마구잡이 벌목으로 이어졌다. 이후 토종 황칠나무를 볼 수 없게 되면서 전통 칠공예로서 황칠도 사라져갔다.

최근 남서해안 및 도서 지역에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되면서 오랜 세월 맥이 끊긴 황칠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지난 8일 토종 황칠나무 수액의 채취 과정을 보고자 국립산림과학원 특용수과 김세현(49) 박사와 함께 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의 자생군락지를 찾았다.

제주도에 70% 자생… 15년생부터 채취

한반도의 황칠나무 중 70%가 자생한다는 제주도. 도민들 대부분이 황칠나무를 잘 몰라 땔감이나 부목용으로 벌채를 해 지금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계곡에만 남아 있다. 그나마 15년 이상 자라야 채취가 가능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한다.

김 박사는 1991년부터 5년간 전통 황칠의 복원 및 산업화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우량개체를 골라 유전자 보존을 하는 작업과 수액 채취 방법을 개선하는 데 실적을 쌓고 있다. 김 박사는 “잎에는 다량의 사포닌 성분이 있고 꽃에는 꿀이 있으며 원적외선 방사 에너지가 방출된다.”며 황칠나무의 용도가 다양함을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땐 잎만 따도 잡아가

구영국(48·황칠공예 명인 127호)씨는 200년간 끊어진 전통 황칠공예의 맥을 이으려는 장인(匠人)이다.“옻칠은 잘 알면서도 우리의 전통 황칠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그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다양한 소재에 황칠을 시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람이 황칠나무 잎만 따도 잡아간다고 했어요.” 당시 일본으로 한국의 황칠이 유출됐으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일본은 이미 황칠의 비밀을 풀었지만 정작 국내에는 확인된 황칠 유물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옻칠이 천년이면 황칠은 만년이라고 했어요.”

보존성이 뛰어난 황칠의 특성상 국내 어딘가에는 유물이 남아 있으리라고 구씨는 확신한다. 박물관 수장고를 뒤져서라도 황칠 유물을 찾는 것이 그의 바람이고 숙제다. 그 숙제를 푸는 날 우리는 빛나는 전통문화 하나를 되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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